- 글/사진. 동우석(청년자문위원 기자)
일본 가나자와시 노다야마에 가다
매헌 윤봉길 의사 유해 봉환 80주년, 평화와 공존을 위한 기억의 계승
1946년 3월 6일,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노다야마 공동묘지의 비탈진 길에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발견됐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을 바친 한 청년의 흔적이 타국의 땅에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80년이 지난 지금, 가나자와에는 윤 의사를 기리는 두 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곳은 한·일 우호와 동아시아 평화를 기원하는 기억의 장소가 되고 있다.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 앞에서 열린 순국 추도식
의거 이후 이어진 일본에서의 순국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기록돼 있다. 그 장면은 교과서와 역사 속에서 자주 이야기되지만, 그 이후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다. 자료를 살펴보니 의거 이후 이어진 그의 마지막 시간들이 오히려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의거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 의사는 일본군의 심문을 받은 뒤 1932년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가나자와성 구금소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윤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경 제9사단 공병작업장 인근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24세 6개월이었다. 그 짧은
삶의 끝을 따라가다 보니, 한 청년이 감당해야 했던 시간의 무게가 더욱 또렷하게 느껴진다. 일본제국군은 윤 의사의 순국 사실이 알려져 독립운동이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 결국 윤 의사의 유해를 노다야마 공동묘지에 암매장했고, 유족과 지역신문 ‘홋코쿠신문’에는 화장했다고 허위 발표했다. 그렇게 윤 의사의 유해는 무려
4,825일 동안 차가운 땅속에 묻혀 있었다.
순국선열의 유해를 되찾기 위한 사투
1945년 8월 15일, 윤 의사가 생전에 그토록 염원했던 광복이 찾아왔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 속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독립을 맞은 직후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이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윤봉길 의사’였다는 사실이다. 해방 직후의 한반도는 정치적 혼란 속에 있었지만, 백범 김구 선생은 윤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1945년 11월 일본에 남아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박열, 이강훈, 원심창 등에게 윤 의사의 유해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박열 선생을 위원장으로 하는 ‘윤봉길 의사 유해 발굴 봉안 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1946년 2월 말 도쿄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식을 마친 뒤, 서상한 선생을 단장으로 하는 발굴단이 가나자와로 향했다. 발굴단은 3월 2일 가나자와에 도착해 재일동포 청년 50여 명과 함께 노다야마 공동묘지를 찾았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이틀 동안의 수색은 성과 없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발굴단은
포기하지 않았다. 서상한 단장은 묘지 전체를 파헤쳐서라도 유해를 찾겠다고 밝혔다. 그날 밤 일본군 간수였던 시게하라가 찾아와 암매장 장소를 알려줬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946년 3월 6일, 발굴단은 시게하라가 알려준 비탈길을 따라 땅을 파 내려갔다. 그곳에서 순국 당시 사용된 나무 십자가와 함께 윤 의사의 유해가
발견됐다. 유실된 손가락뼈 일부를 제외한 201개의 유골이 수습됐다.
조국으로 돌아온 윤봉길 의사의 영혼
윤 의사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한 장면에서 멈추게 된다. 오랫동안 일본 땅에 묻혀 있던 한 청년이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수습된 윤 의사의 유해는 1946년 3월 8일 가나자와역을 출발해 도쿄로 옮겨졌고, 이후 같은 해 5월 15일 조국으로 봉환됐다.
이어 7월 6일에는 광복 이후 첫 국민장이 거행됐다. 수많은 국민이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고, 그의 유해는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긴 시간 타국의 땅속에 묻혀 있던 독립운동가가 마침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이후 가나자와의 암매장 장소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해당 부지에 쓰레기 소각로가 설치되면서 재일동포 사회에서 문제 제기가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이곳의 역사적 의미가 다시 주목받게 됐다.
1992년 상하이 의거 60주년을 맞아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협조를 받아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를 건립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순국 60주년을 기념해 재일동포와 일본 시민단체가 함께 ‘암장비석’을 세웠다.
두 기념비는 같은 인물을 기리지만 서로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순국기념비는 한·일 화해와 우호, 동아시아 평화를 향한 메시지를 전하고, 암장비석은 과거의 비극을 기억하고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다짐을 담고 있다. 시간을 건너 세워진 이 두 기념비는 윤 의사의 삶과 역사를 오늘까지 이어주는 또 하나의
기억이 되고 있다.
윤봉길 의사가 남긴 평화의 정신
윤봉길 의사의 유언 가운데 “나의 빈 무덤에 술 한 잔을 따르라”는 말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 시민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으며, 매년 4월과 12월에는 윤 의사의 의거와 순국을 기리는 추모 행사도 열린다. 이시카와현을 관할하는 민주평통 일본중부협의회 가나자와
지역 자문위원들은 순국기념비 보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 민단과 지역 시민단체, 주민들과 함께 기념비를 관리하고 다양한 기념사업을 진행하며 윤봉길 의사의 정신을 기억하고 있다.
윤봉길 의사 유해 봉환 80주년을 맞아 우리는 다시 한번 역사와 기억의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한 사람의 희생과 선택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이어지며 오늘의 평화와 공존을 생각하게 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